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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 은행나무

정유정 작가는 생과 죽음의 현장, 좀 더 세밀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죽어가는 그 현장을 몇번이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되감기로 감아본듯이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책에서 그 면모는 더욱 강력히 드러나는데,

'유진'이가 정말로 악인인지, 섣부른 정의에 의한 피해자인지 의심을 품고 있던 독자들에게

작가는 죽음의 현장에 대한 세밀하고도 밀도 높은 묘사로 명확히 그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의심이 남는 것은

'문제의 핵에 도달하기까지 파헤치지 않으면 무엇이 진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진리,

또 하나의 피해자로 남은 H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덮은 후에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 여전히 계속 의심이 된다.

먼 옛날 보았던 영화 <다우트>를 보고 고민했던 그 때처럼.

I have such dou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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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김영사

P.31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다른 동물, 예컨대 사자나 상어는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그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생태계는 사자나 상어가 지나친 파괴를 일으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사자의 포식 능력이 커지자 가젤은 더 빨리 달리는 쪽으로 진화했고, 하이에나는 협동을 더 잘하도록 진화했으며, 코뿔소는 더욱 사나워지도록 진화했다.


이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P.134~5


초기 농부들이 에측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아이들에게 모유를 덜 먹이고 죽을 더 많이 먹이면 면역력이 약해져 영구 정착촌이 전염병의 온상이 되리란 사실이었다. 그들은 또한 단일 식량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가뭄에 더욱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또한 풍년에 넘쳐나는 창고는 도둑과 적을 유혹할 것이며 이를 방비하려면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서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사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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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자주하는가?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의 사수이셨던 차장님께서는 "**씨는 죄송하다는 말을 많이하네요"란 얘기를 하셨다.

죄송하지 않은 일에 죄송하다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은 어느샌가 그걸 당연한 듯 여기게 되고,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그런 태도가 더욱 나 스스로를 아래로 깔고 가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혹여 오해가 있을까 밝혀두자면 이 말씀을 해주신 차장님께선 남자분이심)

 

 

입사 초기에 회사 책장에 꽂혀있던 책 중에 같은 맥락의 글이 있었기에 공유해보고자 한다.

(전미옥, 『여자의 언어로 세일즈하라』, 브레인미디어)

여성들은 평소에도 자신이 너무 직선적이거나 독선적, 혹은 이기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그래서 적당히 한 발 빼며 빠져나갈 여지를 만드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하곤 한다. 무의미한 감탄사를 연발한다든지, 애매한 수식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도 남의 생각을 얘기하듯 "..... 인 것 같아요"라는 말은 여성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대표적인 단골 화법이다.


분명하고 확실한 용어나 표현으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독선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애매한 수식어를 버리고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 더 유능하고 신뢰감 있어 보인다. 그래서 비즈니스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세일즈우먼에게는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지나치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한다거나, 칭찬을 받는 것에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 외에 말꼬리를 흐리고 대답을 잘 안 한다거나, 한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하는 것도 성숙하지 못한 대화 습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이지 많이 '찔렸다'

내가 정말 자주 사용하는 말이 '~한 것 같아요' 혹은 '죄송합니다'인데, 이 언어는 사실은 습관적인 것인데

그 근저에는 겸손해보이고 싶은 마음, '나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마음이 컸던 탓이다.

 

 

오늘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나는 '낙지돌솥밥'을 시켰는데, '바지락돌솥밥'이 나왔다.

당황한 나는 "저... 낙지돌솥밥 시켰는데...."라고 작게 이야기했고 주인 아저씨는 "바지락돌솥밥 시키셨어요"라고 단호히 얘기하셨다.

그러다가 바꿔주겠다고 음식을 다시 주방으로 가져가는 아저씨 뒤통수에 내가 한 말은 또 "죄송합니다"였다.

사실, 난 내가 낙지돌솥밥을 얘기했을 거라고 90%정도 믿고 있는데 혹시 모를 10%를 대비해서 죄송합니다를 얘기한 것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사합니다"가 산뜻하고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당황한 순간이면 튀어나오는 습관의 언어란...

좀 더 당황스러운 장면은 뒤에 이어지는데 바지락돌솥밥 1개를 시킨 아주머니께 낙지돌솥밥이 2개 나온 순간이었다.

10cm정도 간격으로 가까이 앉아있었기에 나도 정확히 들었는데 이 때도 역시 주인 아저씨는 당당한 기색이셨다.

"2개 시키셨잖아요"라며 강하게 응수하자 "제가... 그랬나요..?"하며 아주머니 목소리도 작아지셨고,

내가 "아까 바지락돌솥밥 1개 시키셨어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저씨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없이 음식을 주방에 가져갔다.

그런데 이 때 또 아주머니가 내뱉은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하... 왜 이리도 우린 이 말이 입에 붙은 걸까?

 

 

정말 죄송한 일에 죄송하다 말하고 그 외에는 산뜻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과연 가능할런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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